시민의 힘으로 이룬 '시흥 오이도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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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유적 보존을 위한 지역 시민운동 사례
시민의 힘으로 일구어 낸 '시흥오이도유적'
시흥시 정왕동 옛 오이도섬 일대 434,981.7㎡이 드디어 '시흥오이도유적(始興烏耳島遺蹟)'이라는 명칭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로써 한국수자원공사의 시화지구개발공사로 인해 파괴될 위험에 처해있던 오이도의 문화유적은 선사유적지로 보존·조성되어 후대들에게 이어져갈 수 있게 되었다. 오이도 유적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기까지에는 지역의 시민단체와 오이도 주민들이 펼친 2년여에 걸친 끈질긴 운동의 과정이 있었기에 더욱 의미깊다.
오이도 유적은 지난 1960년에 고고학자 윤무병교수에 의해 처음 학계에 소개된 이후, 서해안의 가장 대규모 패총으로서 신석기로부터 역사시대로 이르는 연안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소중한 유적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후 1988년, 1994년, 1999년, 2000년, 2001년에 서울대박물관에서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 과정을 거치면서 수많은 유물과 유구가 발견되어 오이도 패총의 문화재적 가치와 중요성은 이미 입증된 바 있다.
그러나 발굴의 역사는 다른 한편에서 보면 오이도 패총 지역의 소멸의 역사라 표현할 수 있다. 그동안의 발굴조사가 거의 구제발굴 차원에서 이루어지면서 발굴이 끝난 후에는 여지없이 그 지역은 개발 공사의 삽날에 훼손되어 버린 것이다. 신포동패총, 소래벌패총, 가운데살막패총 등 오이도의 소중한 문화자산이 기록속에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매우 귀중한 문화유적이라고 요란스럽게 보고된 후, 문화재 현장 자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관행이 거듭되면서, 지역 시민단체와 오이도 주민들은 문화유적의 발굴이, 단지 박물관에 전시되는 유물 몇점과 기록으로만 남고 현장자체는 사라져버리는 현실을 막기 위해, 지역민들에 의해 지방의 문화유적을 보존하기 위한 활동이 전개되어야 함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00년 초, 오이도의 또 다른 패총지역으로 알려져 있던 안말지역에 대한 수자원공사의 대대적인 개발공사 계획이 시도되고, 이를 막기 위해 시흥YMCA를 비롯한 시민단체와 오이도 주민들은 '오이도 선사유적 보존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위원장 이화섭)를 구성하여 보존활동을 벌여나가게 된다.
대책위원회는 우선 오이도 패총과 관련한 조사·연구 과정을 선행하였는데, 이는 대책위원들이 오이도의 문화유적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과정이며, 한편으로 보존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대책위원회는 관련 논문과 자료 모으기, 전문가 면담, 주민 구전자료 수집, 학술토론회 개최 등은 물론 오이도 전지역의 패각층을 수차례 답사하였다. 이를 토대로 오이도 패총의 사적지정요청을 골자로 하는 시민건의서를 문화재청과 시, 도에 제출(2000.5.19)한 이래, 보존운동 과정에서 질의서, 제안서, 보고서 등의 공문을 30여회에 걸쳐 발간, 제출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한편 개발주체에 의한 더 이상의 문화재 훼손행위를 막아내고, 훼손 책임을 묻기 위해 문화재법 위반으로 3차례에 걸쳐 고발하는 등의 법적 대응도 병행하였다. 이러한 대책위 활동의 결과 2001년 말부터는 지역의 행정기관과 시의회가 사적지정운동에 적극 나서게 되었고, 서명운동을 통해 인근 주민과 시흥시민들로 보존운동의 역량이 확산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오이도 유적은 수많은 난관을 뚫고 소중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는 쾌거를 이루게 된 것이다.
오이도 패총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기까지 중요한 동력이 되어왔던 오이도 패총 보존 시민운동의 의의를 살펴보면, 첫째 본 운동이 '시민운동으로서의 문화유적 보존운동'의 중요한 사례가 될 수 있다는데 있다. 그동안 관련학자나 행정기관의 몫 정도로 여겨졌던 문화유적 발굴의 문제에 대해 지역시민운동적 관점에서 접근함으로써 현장보존의 중요성, 문화유적에 대한 지역민들의 향유권, 자연환경과의 연관성, 관광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 등 다양한 관점에서 문화유적 보존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둘째로 옛오이도 섬에 거주했던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운동'이라는 점에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주민들은 개발공사로부터 문화유적을 지키는 일상적인 감시자로, 때로는 지역 구술 자료를 모으고 현지를 답사하는 조사연구자로, 문화유적을 일반 시민에게 알리고 교육하는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셋째로 오이도 패총 보존운동은 '지역운동의 관점에서 시흥의 지역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선사시대로부터 역사시대를 거치며 장구한 역사를 일구어왔던 '시흥군'은 현재 문화·정서적으로 성격이 다른 몇몇의 짜투리 지역이 모인 기형적 형태의 '시흥시'로 행정구역이 이루어져, 지역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지역운동속에서 오이도 패총을 발견함으로써, 시흥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 수많은 포구와 염전, 연안 생태와 문화재 등의 흔적과 함께 서해안 연안도시로서 시흥의 색깔을 찾는 중요한 맥을 제공해준 것이다. 또한 이를 토대로 오이도 패총을 중심으로 하는 연안 생태문화관광의 가능성이 적극 모색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이도 패총 보존운동은 평범한 지역주민과 지역 시민단체가 지역 문화유적의 문제에 대해 적극 개입해나간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성과를 토대로 앞으로도 지역민의 관점으로, 지역민의 힘에 의해서,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적인 '시흥오이도유적'이 보존되고, 조성되어 널리 향유되어 갈 것으로 기대한다. (오이도 선사유적 보존 시민대책위원회 031-315-4310)
시민의 힘으로 일구어 낸 '시흥오이도유적'
시흥시 정왕동 옛 오이도섬 일대 434,981.7㎡이 드디어 '시흥오이도유적(始興烏耳島遺蹟)'이라는 명칭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로써 한국수자원공사의 시화지구개발공사로 인해 파괴될 위험에 처해있던 오이도의 문화유적은 선사유적지로 보존·조성되어 후대들에게 이어져갈 수 있게 되었다. 오이도 유적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기까지에는 지역의 시민단체와 오이도 주민들이 펼친 2년여에 걸친 끈질긴 운동의 과정이 있었기에 더욱 의미깊다.
오이도 유적은 지난 1960년에 고고학자 윤무병교수에 의해 처음 학계에 소개된 이후, 서해안의 가장 대규모 패총으로서 신석기로부터 역사시대로 이르는 연안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소중한 유적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후 1988년, 1994년, 1999년, 2000년, 2001년에 서울대박물관에서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 과정을 거치면서 수많은 유물과 유구가 발견되어 오이도 패총의 문화재적 가치와 중요성은 이미 입증된 바 있다.
그러나 발굴의 역사는 다른 한편에서 보면 오이도 패총 지역의 소멸의 역사라 표현할 수 있다. 그동안의 발굴조사가 거의 구제발굴 차원에서 이루어지면서 발굴이 끝난 후에는 여지없이 그 지역은 개발 공사의 삽날에 훼손되어 버린 것이다. 신포동패총, 소래벌패총, 가운데살막패총 등 오이도의 소중한 문화자산이 기록속에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매우 귀중한 문화유적이라고 요란스럽게 보고된 후, 문화재 현장 자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관행이 거듭되면서, 지역 시민단체와 오이도 주민들은 문화유적의 발굴이, 단지 박물관에 전시되는 유물 몇점과 기록으로만 남고 현장자체는 사라져버리는 현실을 막기 위해, 지역민들에 의해 지방의 문화유적을 보존하기 위한 활동이 전개되어야 함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00년 초, 오이도의 또 다른 패총지역으로 알려져 있던 안말지역에 대한 수자원공사의 대대적인 개발공사 계획이 시도되고, 이를 막기 위해 시흥YMCA를 비롯한 시민단체와 오이도 주민들은 '오이도 선사유적 보존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위원장 이화섭)를 구성하여 보존활동을 벌여나가게 된다.
대책위원회는 우선 오이도 패총과 관련한 조사·연구 과정을 선행하였는데, 이는 대책위원들이 오이도의 문화유적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과정이며, 한편으로 보존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대책위원회는 관련 논문과 자료 모으기, 전문가 면담, 주민 구전자료 수집, 학술토론회 개최 등은 물론 오이도 전지역의 패각층을 수차례 답사하였다. 이를 토대로 오이도 패총의 사적지정요청을 골자로 하는 시민건의서를 문화재청과 시, 도에 제출(2000.5.19)한 이래, 보존운동 과정에서 질의서, 제안서, 보고서 등의 공문을 30여회에 걸쳐 발간, 제출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한편 개발주체에 의한 더 이상의 문화재 훼손행위를 막아내고, 훼손 책임을 묻기 위해 문화재법 위반으로 3차례에 걸쳐 고발하는 등의 법적 대응도 병행하였다. 이러한 대책위 활동의 결과 2001년 말부터는 지역의 행정기관과 시의회가 사적지정운동에 적극 나서게 되었고, 서명운동을 통해 인근 주민과 시흥시민들로 보존운동의 역량이 확산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오이도 유적은 수많은 난관을 뚫고 소중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는 쾌거를 이루게 된 것이다.
오이도 패총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기까지 중요한 동력이 되어왔던 오이도 패총 보존 시민운동의 의의를 살펴보면, 첫째 본 운동이 '시민운동으로서의 문화유적 보존운동'의 중요한 사례가 될 수 있다는데 있다. 그동안 관련학자나 행정기관의 몫 정도로 여겨졌던 문화유적 발굴의 문제에 대해 지역시민운동적 관점에서 접근함으로써 현장보존의 중요성, 문화유적에 대한 지역민들의 향유권, 자연환경과의 연관성, 관광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 등 다양한 관점에서 문화유적 보존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둘째로 옛오이도 섬에 거주했던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운동'이라는 점에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주민들은 개발공사로부터 문화유적을 지키는 일상적인 감시자로, 때로는 지역 구술 자료를 모으고 현지를 답사하는 조사연구자로, 문화유적을 일반 시민에게 알리고 교육하는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셋째로 오이도 패총 보존운동은 '지역운동의 관점에서 시흥의 지역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선사시대로부터 역사시대를 거치며 장구한 역사를 일구어왔던 '시흥군'은 현재 문화·정서적으로 성격이 다른 몇몇의 짜투리 지역이 모인 기형적 형태의 '시흥시'로 행정구역이 이루어져, 지역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지역운동속에서 오이도 패총을 발견함으로써, 시흥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 수많은 포구와 염전, 연안 생태와 문화재 등의 흔적과 함께 서해안 연안도시로서 시흥의 색깔을 찾는 중요한 맥을 제공해준 것이다. 또한 이를 토대로 오이도 패총을 중심으로 하는 연안 생태문화관광의 가능성이 적극 모색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이도 패총 보존운동은 평범한 지역주민과 지역 시민단체가 지역 문화유적의 문제에 대해 적극 개입해나간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성과를 토대로 앞으로도 지역민의 관점으로, 지역민의 힘에 의해서,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적인 '시흥오이도유적'이 보존되고, 조성되어 널리 향유되어 갈 것으로 기대한다. (오이도 선사유적 보존 시민대책위원회 031-315-4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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